코로나 시절 이후 ‘바이러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쪼그라들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영화 ‘바이러스’는 그 익숙한 단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더라고요. 감정을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라니, 처음엔 SF인가 싶었는데 오히려 너무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였어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 ‘치사율 100%’라는 설정이 낯설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사실 저도 가끔은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영화 속 그 이상한 긍정의 감정이 꼭 현실에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보고 나서 한동안은 그 치사율 높은 낙천이 괜히 그리워졌어요.
강이관 감독의 '이상한 감정 실험'
보통 바이러스가 등장하는 영화는 긴장감과 공포가 중심인데, 이 영화는 반대예요. 강이관 감독은 ‘사랑이 감염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라는 역설적인 질문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요. 영화 내내 분위기는 경쾌하고 유쾌한데, 그 속에 묵직한 질문이 숨어 있어요. “사랑은 정말 누구에게나 이로운가?” 이 질문을 영화가 대놓고 하지 않지만, 전염된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감염된 사람은 온 세상이 좋아 보이지만, 그 낙관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설정 자체가 참 묘했어요. 감독은 이 설정을 가지고 공포보단 따뜻함과 위트를 섞은 로맨틱 풍자로 풀어내더라고요.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산뜻하게 풀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어요.
이 실험적인 설정은 감독 특유의 시선으로 아주 유연하게 풀어지더라고요.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불편함도 의도된 것이고, 영화의 톤 앤 매너는 그것을 감싸는 따뜻한 담요처럼 느껴졌어요. 강이관 감독이 지금까지 보여준 스타일과도 조금 다르게, 이번 작품에선 사람의 내면, 특히 감정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바이러스라는 매개체로 시각화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듯했어요. 그걸 설명적으로 푸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변화로 보여주는 방식도 인상 깊었고요. 예를 들어 감염 전과 후의 인물 표정 변화, 대사 템포, 주변 색감이 미묘하게 바뀌는데, 그런 연출적 장치는 관객이 무의식 중에 감정의 변화를 느끼게 만들더라고요. 단순히 신선한 소재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의 무서움과 소중함을 동시에 새기게 되는 구조로 보였어요.
로맨틱 코미디? 디스토피아 풍자? 그 경계에서
영화는 장르적으로도 굉장히 독특했어요. 일단 배두나가 연기한 옥택선 캐릭터가 너무 현실감 있었고, 손석구와의 케미도 예상 밖이었죠. 코미디 장면에서는 웃음을 유도하지만, 그 웃음이 끝나고 나면 왠지 마음 한편이 허전함을 느꼈어요. 이 영화가 말하는 로맨스는 단지 설렘이나 환상이 아니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감정의 무게’를 다루는 것 같아요. 특히 감염이라는 메타포는, 요즘 우리가 겪는 SNS 감정 전염이나 긍정 강박 같은 현실과도 맞닿아 있잖아요. 강이관 감독은 이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것 같아요. 영화 내내 관객은 이게 로맨틱 코미디인지 디스토피아인지를 헷갈리는데, 바로 그 모호함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무겁고 진지한 테마를 코믹한 겉포장으로 감싸는 방식은 보는 내내 흥미로웠어요.
이 영화가 특별한 건, 우리가 흔히 아는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절묘하게 비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거예요. 말장난식 대사나 타이밍이 묘하게 어긋나는 상황들이 관객에게 의외의 웃음을 주는데, 그 웃음 뒤에 살짝 숨겨진 쓸쓸함이 늘 따라붙어요. 예를 들면 손석구가 맡은 인물이 보여주는 무심한 배려, 장기하 특유의 어색한 현실감이 중간중간 터지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 계속 요동쳐요. 특히 ‘로맨스’라는 틀 안에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깔려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감정을 깊게 만들어요. 현실 속 연애도 사실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잖아요. 그런 현실적인 정서를 이 영화는 풍자적으로 녹여냈고, 그게 전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경계를 걷는 듯한 그 톤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개성인 것 같아요.
사랑이 전염병이라면 나는 걸리고 싶을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감정 감염’이라는 설정이 주는 철학적 여운이었어요. 영화 속 감염자들은 극도로 낙천적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애정을 쏟고, 뭐든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요. 겉보기엔 행복해 보이지만, 실은 이 감정이 본인의 진짜 의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그건 과연 사랑일까?라는 고민이 남아요. 특히 배두나가 감염 후 보여주는 감정의 기복은 정말 섬세했어요. 그 감정이 진짜인지, 바이러스 탓인지, 점점 구분이 안 가게 되는 그 지점이 저는 가장 무섭게 느껴졌어요. 동시에, 나도 때론 그렇게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단 생각도 들었고요. 이 영화는 묻지 않아요. 그저 보여줄 뿐인데, 보고 나면 머릿속에 질문이 가득 남아요. 사랑은 선택일까, 감염일까. 그 물음이 영화관을 나와서도 오래 머물렀어요.
가장 흥미로웠던 건 ‘사랑의 감염’이라는 소재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에요. 누군가를 좋아하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들이 사실은 외부 요인 때문이라면 그건 진짜 내 감정일까? 이런 고민은 단순히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하는 질문이더라고요. 예를 들어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 우리는 종종 그 감정을 타인에게서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그 감정이 나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면,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런 딜레마를 말로 설명하지 않아요. 그저 감염된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 그리고 점차 변해가는 관계를 통해 관객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죠. 그리고 그 질문이 오래 남아요. 나는 정말 사랑을 원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상태가 주는 안정감에 중독된 걸까? 영화가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 둥글게 맴도는 질문이었어요.